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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교회는 AI를 내칠 것인가 끌어안을 것인가?
by Patrick Miller2023-07-25

지난 5일 사이에 AI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까지 침투했다. 처음으로 ChatGPT의 언어 슬롯 머신이 가동되었고, 어려운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좋은 답변을 내놓았다. 수십 년 전 생산직 근로자가 겪은 일을 지금 사무직 근로자가 그대로 경험하고 있다. 자, 진짜 적은 비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대로 해내는 기계가 등장했다. 


패닉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한 경고음이 전 세계 문화에 걸쳐서 울렸다. ChatGPT 이전에 AI에 대해 전혀 몰랐던 직업 사상가들도 너도나도 앞다투어 소셜 미디어와 팟캐스트에서 최신 정보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사상가들은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그들은 AI가 만들어갈 생성 가능성을 즐기며 세상을 바꾼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AI 제품의 가내 산업을 시작했다.


고작 몇 달 사이에 AI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1) 생성 AI가 일자리를 빼앗고 영적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비판적 입장. (2) AI가 목회자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실용주의 입장이다. 


급속한 기술 양극화는 하나도 놀라운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AI에 관해서 계속해서 글을 썼다. 대부분이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윤리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생성 AI가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졌다. 그렇다고 내 속에 두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생소하기만 한 기술 전쟁에서 한 쪽 편을 선택하는 대신에 잠시 멈추고 대화하고 또 생각할 때이다. 잠언 저자의 말이 옳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잠 19:2). 오로지 비판만 하는 것도, 오로지 실용주의 입장으로만 보는 것도 다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입장 다 비윤리적인 AI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AI 비판의 위험


두려운 것부터 시작하자. 생성 AI는 (말하자면, 텍스트, 이미지, 코드, 비디오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설교 연구, 설교 그래픽 생성, 소그룹 질문 생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더불어서 설교, 블로그 및 팟캐스트 스크립트 작성도 수행할 수 있다. 영적 질문이 있는 평신도가 목사와 멘토를 찾는 대신에 얼마든지 AI에 의존할 수도 있다. AI가 기꺼이 그들에게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모르는 게 없는 이 컴퓨터는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고 지식을 만들어내는가? 모든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특정 데이터 세트를 사용하여 학습한다. 예를 들어 ChatGPT는 2021년 이전 버전의 인터넷에서 교육을 받았다. 질문마다 질문의 매개 변수와 만족스러운 답으로 간주되는 자체 교육을 바탕으로 해서 나름의 만족스러운 답변을 예측한다. LLM은 크라우드 소싱된 답변을 제공하며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제공하도록 조금씩 수정된다. 


ChatGPT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뻔한 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ChatGPT의 답이 뻔하다는 게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무한해 보이는 정보에 빠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도를 얼마든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봇(bot)을 통해서 쉽게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배우고 또 열심히 지혜를 키우려고 노력하겠는가? ChatGPT 같은 LLM이 주는 약속이 무엇인가? 노력 없이도 얼마든지 숙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광범위한 인터넷 세계마저도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AI는 엄청난 기술 변화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하늘이 무너진 건 이미 한참 전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 속에서 살고 있다. ChatGPT가 AI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일깨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AI를 일상생활로 도입한 게 ChatGPT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맞춤법 검사, Google 검색, 내비게이션 앱, 차량 공유 앱, Siri, Alexa, 음성 텍스트 변환, 소셜 미디어 피드, 비디오 게임, 얼굴 인식, 스팸 필터, AI 코딩 앱, AI 자동화 배송 및 물류, AI 지원 의료 스캔, 나아가서 AI 전쟁에 이르기까지, AI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존재했다. 온라인에서 지금 당신이 보는 내용 대부분은 AI가 당신의 취향을 분석해서 내어놓은 내용이다. AI가 위험하다며 당신이 온라인에 분노를 표출할 때 정작 그 분노를 중재하는 것도 다 AI이다. 누가 무엇을 보는지 결정하는 것도, 어디에 참여하고 또 어떤 식으로 현실을 보도록 할지를 조종하는 것도 이미 AI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기술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우리가 기계 학습, 신경망 또는 알고리즘 계산에 분노할 수 있는가? 


AI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기술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춰야 한다. 고맙게도 목회자, 신학자, 윤리학자에게 다양한 분야에 걸친 AI 적용을 소개할 수 있는 쉬운 글과 팟캐스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이 정도의 학습으로는 보다 세분화된 수준에서 AI를 이해할 수 있는 실무자(AI 엔지니어, 개발자 및 연구원)와의 대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


AI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AI가 미칠지도 모르는 기형적 영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싶다면서 새로운 변종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AI라는 기술 상자를 열고 내부를 살펴보고 모든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사용 사례를 숙지하고, 이 문제에 관해서 윤리적으로 대응할 제자를 준비시켜야 한다. 


AI 실용주의의 위험


모두가 “하늘이 무너진다!”라고 외치는 건 아니다. 주변의 구름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AI가 몰고 오는 안개에 대해서는 알지만, 심각한 윤리적 질문 없이 무작정 AI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유용성이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자이다. 그들은 단지 관리적인 질문만 던진다. 시간 절약이 가능할까? 돈을 아낄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까?


교회와 같은 기관을 이끄는 누구에게나 실용적인 질문은 중요하기에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런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은 효율성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부합해야 한다. 


생성 AI는 얼마든지 (단조롭고 관습적인)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목회자의 성경적 의무이다. 이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현명하지 않다. 아무리 발전된 기계라도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살아 움직이는 진리로 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때그때 설교를 조율할 수 없다. AI는 결코 설교 내내 우리가 의지하고 또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에게 맞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 신념 없이 AI를 받아들인다면, 윤리적 실책을 범하게 될 것이다. 왜? 윤리적 원칙이 y라는 목표 달성에 x의 수행이 가장 효율적이라면 x를 수행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공리주의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길


사도행전 17:26에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국가 질서를 주권적으로 정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초기 AI 시대에 사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믿어야 한다. 


다윗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긴”(행 13:36) 것처럼 우리도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우리가 AI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우리 자녀들이 물려받은 윤리적 규범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대를 초월하여 AI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실용주의자들은 미래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기에 멀리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두려워하는 사람도 현재에 갇혀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AI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이지 않게 통합하고 있는지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기에, AI에 관한 속보에 단지 반사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진짜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해야 할, 보이지는 않지만 진짜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한 AI의 운영 방식에는 둔감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역량(신학, 윤리 및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일상생활에 미치는 AI의 윤리적 파급 효과를 탐구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용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평신도가 자신의 AI 사용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간단한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두려움에 빠진 비판주의자와 실용주의자 사이의 논쟁에 에너지를 계속 낭비한다면 우리는 AI의 발전 단계에서 어쩌면 중간 단계에 살고 있는 독특한 우리 세대의 책임을 간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연 대화이다. 다양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교육함으로써 우리가 원해서 시작하지 않은 이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윤리적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꼭 필요해서 AI 세상 속에 우리를 두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원제: Should We Embrace or Evict AI in Church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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